

지난 93년 9월 인공종묘 대량생산에 성공, 자라양식기반을 다진 배상기씨 |
자라의 피와 꿀, 안삼 및 중국한약을 섞어 만든 이 스프는 약물복용 의혹을 불러 일으킬 만큼 탁월한 효력을 발휘했다.
마라톤을 제외하고는 체질상 육상은 백인이나 흑인이 독점, 황색 인종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92년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자라드링크제를 복용한 마군단이 혜성처럼 나타나 중장거리에서 싹쓸이 기록사냥을 하면서 드링크제가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마코치가 20년간 독자적으로 연구개발한 스프와 드링크제는 고통을 이기고 몸을 가볍게 하며 피로를 빨리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는 주성분이 자라였다.
지난해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둔 한국대표팀은 따뜻한 날씨를 찾아 제주도로 갔지만 훈련 4일을 남겨두고 대부분의 선수가 몸살감기로 고생했다. 이때 특별영양식으로 공급된 것이 전남 나주 저수지에서 잡은 자연산 자라였다. 이 덕분인지 대표팀은 일번을 7회 콜드게임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자라에는 성장기에 필수적이며 우리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는 8종의 필수 아미노산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고, 동물성이면서도 식물지방과 같은 고도 불포화지방산이 많이 들어있다.이로 인해 [중약대사전]에는 자양강장제로 기록돼 있다.
무엇보다도 현대 영양학에서 말하는 영양소와는 다른 생리활성물질을 풍부하게 함유, 고영양의 이상적인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자라는 인체내의 기(氣)를 보강시키고 세포를 정상화, [양생(養生)]이라는 구야말로 특별한 기능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허약한 사람의 보양식품으로 애용돼 왔다. 일본에서는 자라가 옛날부터 황궁요리로 이용됐고 현재도 귀한 손님접대에 최고음식으로 애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자라양식은 명치유신때부터 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근래 30여년 동안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연구기관에서 사육기술 및 가공품 개발을 추진, 지난 한 해 동안 1천 3백여톤을 생산할 만큼 양식업이 일반화돼 있다. 또한 드링크, 차(茶), 사탕, 화장품, 조미료 등 1뱍여가지의 가공품을 개발, 특산품 가게나 휴게소 등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돼 자라는 기호식품이라기 보다는 대중식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생산자 단체운영으로 새끼자라와 식용자라의 생산이 분업화, 체계적이며 효율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생산자 조합은 각 양식장의 물량을 파악, 생산량을 조절하고 이 가운데 70%를 가공상품화하고 있다.
양식 생산량 2백톤 달해
배씨는 지난 80년 4월 전국 최초로 이스라엘 잉어 유통에 손댔다. |
남부지방은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양식이 성행하지만 수질이 나빠 상품성이 떨어진다. 북부지방에 서식하는 자연산은 상품성이 높지만 1kg 성장에 10년 이상 걸려 7백~8백원으로 값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다.
아열대 지방인 대만은 자라 천국이라 불리만큼 양식이 잘 발달돼 있다. 적절한 기온과 자연환경 등으로 5~20kg의 대형자라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국민들의 선호도도 높아 생산량의 50% 정도가 높은 가격에 가공품으로 팔리고 있으며 50여가지의 가공품이 개발돼 있다. 연간 생산량은 6백~7백톤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보혈·양생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져 내수면품종중 가장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양식장 출하가격이 kg당 3만원, 요식업소에서는 4인기준 15만원선에 팔리고 있다. 그러나 자연자원 고갈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종묘 생산과 양식기술이 개발, 보급되면서 자라양식은 매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봉암리 칠곡농장. 종묘생산에 의한 자라양식이 시작된 곳이다. |
지난 95년 연간생산량이 10여톤에 불과했으나 지난해말 현재 양식장 수가 1백~1백20여개소로 늘어 났고, 생산량도 1백80~2백톤으로 급증헸다. 건강식품으로서의 인기도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엑기스, 드링크 등의 가공품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가공품은 아직 초보단계에 불과하며 대부분 생체요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이나 대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식 역사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지라양식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자라에 미친 (?) 한 양식인의 끈질긴 도전과 노력 때문이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봉암리 (칠곡농장)와 군위군 우보면 이화리 (군위농장) 두 곳에서 자라종묘생산과 양성을 겸하고 있는 배상기(50 대구자라양식장 대표)씨가 오늘의 자라양식 산업 기반을 다진 주인공이다.
배씨가 자라양식에 나선 것은 지난 91년 8월. 내수면 가두리양 식이 걸음마를 시작한 지난 80년부터 이스라엘잉어(일명 향어) 유통에 종사, 내수면어류 유통의 산증인이기도 한 배씨는 89년 한 번도 손댄적이 없지만 단번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주위의 권유로 「양파」중간유통에 나서 파산 지경에 놓이게 됐다.
그동안 주 로 취급했던 이스라엘잉어가 실내낚시터에 공급되면서 고급어에서 시장바닥에 나 뒹구는 저급어로 전락,
새로운 사업을 찾았던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90년 가까운 친척들에게 빌린 2백만원으로 다시 어류유통을 하게 된 배씨는 경북 안동호에서 가두리양식을 하던 이정은(은호 수산)씨로부터 자라양식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자라를 요구하는 음식점이 많아 관심은 있었지만 뾰쪽한 방안이 없었던 배씨는 귀가 번쩍 띄었다. 어렵 게 일본의 관련서적과 자료를 수집한 결과, 단 한번도 생물을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승부를 걸만한 사업이라고 판단, 변신을 꾀한 것이다. 도전정신이 강한 배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변신을 시도했다. 지난 대우 옥포조선 무선국장으로 꽤 잘 나가는 직업을 가졌던 배씨는 강원도 춘천 출장길에 이스라엘잉어를 처음 접했다. 쫄깃쫄깃한 회맛에 반해 이를 직접 팔아 보기로 한 것.
80년 4월 5 일 사표를 던진 배씨는 1천3백만 원을 들여 대구시 계산동에 전국 최초로 이스라엘 잉어 식당을 열 고 판매도 함께 했다. 하지만 활어에 대한 개념이 없고 활어차 시설도 초라해 판매하는 것보다 죽이는 양이 더 많아 1년만에 옛 직장으로 돌아갔다. 유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하던 배씨는 82년초 1백80만원 을 들고 대구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잉어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소비가 늘어났고 3∼4명이 유통을 하고 있었다.
춘천 호림수산 이외에는 이스라엘잉어를 생산하는 곳이 없어 경쟁이 심했다. 다행히 배씨는 민물흑돔으로 불리며 인기를 끌던 틸라피아를 구해 일식집 등을 공략,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경쟁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반해 낮에는 활어 차를 끌고 판매하고 밤에는 돈을 받으러 다니기에 몸이 따라주지 않아 또다시 손을 들고 말았다. 84년 경북 경산군(현 경산시) 경산소방서 지령실에 취직, 근무했다. 유통과 별난 인연이 있었던 지 20개월만에 다시 돌아왔다. 유통하면서 알게 된 충북 충주 호에서 가두리양식을 하는 윤송연(현 충북일보 논설위원)씨로부터 경북 칠곡군 동명면(현배씨 의 칠곡농장) 하천부지 8백평을 3천5백만원에, 이스라엘잉어 10 톤을 kg당 3천5백원에 주고 1년 뒤에 갚으라는 제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라일수산이라는 간판을 내건 배씨는 일일 4톤이라는 엄청난 양을 팔았다. 1톤 활어차만 13대를 보유할만큼 탄탄대로를 달렸다.
경쟁업체가 있었지만 2년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돈 을 벌었다. 소양호에 이어 충주호, 안동호 등에서 가두리 양식업이 급속히 늘어나고 이에 따라 유통상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채산성이 갈수록 떨어졌다. 87년 김명광, 권태호, 최봉우, 서완태씨 등 유 통상인 10명이 모여 유통단체를 만들었으나 관리소홀로 1억3천만 원의 적자를 냈다.
지난 97년 8월 일본 오이타현 아지모 자라양식장을 방문해 사육중인 자라를 살피고 있다. |
이를 권태오씨와 둘이서 부채를 떠안고 운영. 4 개월만에 정상화시켰다. 이후 사업체로 분리, 운영하던 배씨는 자라양식으로 전환하게 됐다. 자라수집과 시장성을 조사하기 위해 섬진강, 임진강 등 전국을 샅샅이 뒤진 배씨는 89년부터 40여차례 일본을 드나들며 오이타 내수면연구소와 큐슈지방의 자라양식장 50여곳도 둘러보고 자라를 키우기로 결심을 굳혔다. 또 91년에는 수산진흥원 진해내수면연구소를 찾아 기술자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본책을 번역한 기술지를 주면서도 포기하라고 권유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고 아쉬움이 커 자라 유통상인 들을 대상으로 수소 문에 나섰다. 마침내 전남 영암군에 김종석이라는 사람이 자라를 키우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라양식을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3∼4 년의 경험도 있었다. 2백∼3백평의 못에 자연산 자라를 축양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배씨는 『자라양식 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무나 할 수 없지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며 지금도 그때 방문할 수 있게 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91년 8월,8백여평의 칠곡농장에 사육지와 가온시설을 갖추고 1백여마리의 자연산 자라를 구한 배씨는 본격적인 양식에 들 어갔다. 하지만 단 한 개의 알도 얻지 못했다. 가온을 했음에도 동면중인 자라들은 죽어 나왔다. 간이숙소에서 홑이불을 덮고 추위를 견디면서 지극정성을 기을였지만 헛수고였다. 돈만 가져가고 벌이가 없어 집안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92년 여름 어느날, 모처럼 대구 집에 들른 배씨는 하룻밤도 자지 못하고 농장으로 발 길을 돌리고 말았다.
저녁을 라면으로 차려온 부인(박옥순 43)이 별식으로 생각하며 먹으라고 했다. 알고 보니 집에 쌀이 떨어졌던 것. 각고의 노력 끝에 자라양식에 가장 중요한 수질관리기법을 1년 만에 완벽하게 터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에는 국내 처음으로 산란과 부화에 성공했다. 93년 9월 어느날 아침 산란장 주위를 둘러보던 배씨는 모래 위의 자라 발자국을 발견했다. 산란실험 3년째인 올해도 실패하면 사업포기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배씨는 수북히 덮인 모래를 조심스럽게 팠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작은 하얀 알 수십개가 있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이 부화기로 옮겼다.
보름 동안 거둬들인 알은 3천여개. 수분 10∼25%, 온도 30 C에서 43 ∼45일만에 부화됐다. 부화율은 30% 내외.
93년 9월 알 3천개 얻어
청평내수면연구소의 내수면양식기술 교육에서 자라양식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
부화후 3일동안 물벼룩을 먹이 고 그후 일주일 정도는 실지렁이 를 준 후 15일간 뱀장어용 배합 사료로 순치한 뒤 완전 배합사료 를 먹였다. 한달후 5∼10g으로 자랐다. 부화된 절반정도가 1세대 어미가 됐고 95년 8천개의 알을 얻었다.
다음해 가을 예상치 못한 엄청 난 결과를 얻었다. 이전에 산란 용으로 이용된 자연산 자라는 낚 시나 그물로 잡아 상처나 스트레스로 인해 산란용으로는 부적합 했으나 자체 사육한 자라는 환경 조건만 마련되면 건강한 알을 낳 았던 것이다.
부화율 85∼90%에 13만마리의 새끼를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김종석씨와 전남 순천의 주충실씨도 소량 생산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자연산 자라판매를 하던 충남 논산의 이은상씨는 알 5만개와 새끼 1만 5천마리를 사갔다. 자라에 관심을 가진 10여명도 알을 가져 갔다. 종묘 대량생산에 성공, 자라양식 가능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배씨는 40평규모의 친어지 3개, 30평 규모의 시험양성지와 14평 크기의 종묘사육지 5개 등 사육 지를 확망하고 부화장도 10평 규모로 넓혀 본격적인 양식에 돌입 했다. 자체 생산한 새끼를 키워 성장이 빠른 3∼4년생 1천5백마리를 친어로 확보했다. 하지만 자라양식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94년부터 수입이 허용돼 무역상들이 나서서 수정란과 새끼를 수입, 판매했다. 농가부업으로 전망이 밝다는 광고에 속아 피해자가 속출했다. 심지어 가정집 방을 개조, 자라를 키우는 사례도 있었다. 95년에는 수정란 15만개와 새끼 3만 마리가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수입됐다. 이로 인해 5개소 미만이던 양식장이 갑자기 증가, 96년 50∼80개소로 늘어났다. 그러나 무정란이 많아 부화에 실패하거나 부화된 새끼도 관리 및 기술 부족으로 폐사했다. 충남의 모씨는 자체 생산한 것이라며 수입한 알과 새끼를 팔아 원망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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